정체성 상실한 한국교회 어디로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는 한국교회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오늘 한국교회가 교회다운 교회가 없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교회의 모습은 무엇일까. 교회란 무엇인가. 이 물음 앞에 한국교회가 자유로울 수 있느냐는 이야기다.

분명한 것은 교회는 예수의 하나님나라에 대한 복음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을 믿고, 이를 통해 성취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며, 예수의 하나님나라운동에 참여하는 공동체, 아니 정의와 사랑, 생명과 평화의 공동체를 향해 일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라는데 이의가 없다. 과연 한국교회가 하나님나라 운동인 정의와 사랑, 생명과 평화의 공동체를 위해서 일을 하고 있느냐는 물음이다. 박재순목사는 자신의 저서 <예수와 밥상공동체>(1988년 1월, 도서출판 천지)에서 교회를, 예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교회, 밥상공동체 운동의 실현을 위해 민중지향적인 민중교회와 민중선교단체, 기존의 제도적인 교회 등 세 가지 형태로 구분했다.

첫 번째의 경우는 가진 것은 없지만 참된 나눔을 실현하는 경우이다. 눌리고 빼앗긴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과 함께 나누면서, 자신들의 권리와 몫을 찾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이들은 새로운 나라,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몸부림을 치며, 나눔과 섬김의 선교인 경제정의를 철저하게 실천한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현존과 교회의 참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마지막의 경우는 교회의 양적성장에만 급급하는 경우를 말한다. 오늘 한국교회 대부분이 여기에 속한다.

사실 여기에 속한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성령의 역사가 가난하고,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가운데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성령의 역사’, ‘기복신앙’, ‘하나님의 뜻’, ‘영성’ 등을 내세워 교회 성장에만 몰두한 나머지 사회적 약자들로부터 교회가 외면당하며, 교회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사실 한국교회는 지난 130년 동안 교회성장에 몰두한 나머지, 교회들은 비대해 질대로 비대해져 부자가 되었다. 한마디로 한국교회는 교회다운 교회를 이 땅에 세우지를 못했다. 그렇다 보니 무엇인가를 애타게 기다리며, 가족과 공동체의 권을 위해 교회를 찾았던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를 등지기 시작했다.

오늘 도시나 시골 마을마다 교회의 십자가는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아졌다. 하지만 이 십자가들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맛을 잃어버린지 오래되었다. 이것은 양적으로 팽창한 한국교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 중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군대를 넘어 경찰서, 교도소 등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다. 하지만 교회의 ‘십자가 탑’의 불빛이 꺼지면서, 교인은 계속해서 줄어들기 시작했다. 한때 한국개신교는 기독교가 국교로 착각할 정도로 1300만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교회마다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면서, 사회의 암적 존재인 타락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교회다운 교회가 없다.

그리스도의 하나님나라 복음인 정의와 평화, 그리고 생명과 사랑을 몰각한 채, 십자가탑을 높이기에 경쟁을 벌이고 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이 땅의 가난한 사람, 사이비종교의 바벨을 노래한 나머지 불러온 세월참사, 교인들의 헌금으로 사채 놀이하는 교회, 하늘의 뜻과 축복 등을 내세워 교인들의 주머니를 사정없이 털어내는 사이비목사, 교인들의 고혈을 짜 호화로운 교회당 건축, 보수적인 교회들의 나라의 부패와 몰락을 조장하며 권력의 주변을 맴도는 참담한 모습, 반통일적인 교회의 모습 등등은 이 땅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가까이 갈래야 갈 수 없는 교회라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이다.

이들 교회는 새 세상을 향한 하나님나라운동과 평화적인 민족통일, 사회적 통합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 사이에 두꺼운 벽만 가로놓이게 하는 원인을 교회가 제공하고 있다.

이미 한국개신교는 사회적 약자들의 눈물을 닦아주지를 못하면서, 많은 교인이 교회를 떠났으며, 일부 교인은 교인이기를 스스로 포기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천주교회로 넘어갔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하고도 남음이 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는 교회로 거듭나야
분단된 민족 앞에서 교회는 화해자·중재자 감당 못한 죄 회개하라

예수운동, 하나님나라운동

오늘 한국교회는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는 있지만, 예수와 등진교회가 많다. 예수의 하나님나라운동은 이 땅에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정의와 사랑, 평화와 생명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사실 한국교회 역시 선교초기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하나님나라운동을 펼쳤을 때, 세계교회가 놀라울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 해방이후 6.25한국전쟁, 경제적인 어려움에 있을 때 나눔운동을 통해 성령의 역사도 경험했다. 하지만 공룡처럼 한국교회가 비대해지면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멀어지기 시작했다. 오늘 문을 닫는 교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지적은 이를 잘 대변해주고 있다. 사실 한국개신교는 민족적인 문제와 고난당하는 이웃을 외면했던 일제 36년 기간에 교회성장이 정체되었던 역사를 경험했다. 당시 한국교회는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민족적인 문제를 몰각하고, 일본국가주의에 쉽게 굴복하며, 교회분열만 일삼았다. 최근 20여년간 한국교회의 모습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지난 20년동안 한국교회는 교회성장에 급급하고, 대형교회당 건축에 경쟁을 벌였다. 또한 사회적 약자들을 돌볼 겨를도 없었다. 그것은 공룡처럼 아니 부자가 된 한국교회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부와 인적자원을 함께 나눌 수 있느냐는 것이다.

교인들은 이 같은 상황에 처한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고, 1300만명에 이르던 한국교회의 교인 수는 500만명도 채 안되는 것으로 계산되고 있다. 또한 교회가 부자된 나머지 교회당을 부자교인들의 정서에 맞게 건축하기 시작했고, 새벽마다 교회에 나와 눈물을 흘리는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데 급급했다. 이것도 경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데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의 성장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큰? 모순이다. 오히려 교회는 민족사의 앞길에 방해가 되고 있다. 사실 한국교회는 민족의 가장 큰 문제인 분단극복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느냐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분단극복의 장애가 되면 되었지 분단극복을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를 못했다.

그래서 일부신학자는 세계교회가 세계분단의 중심에 있었던 지난 일에 대해 회개하고, 세계통일을 위해 노력하고 있듯이, 한국교회도 남북분단의 중심에 있었던 지난날을 회개하고, 분단극복을 위해 노력하며, 민족화해의 마당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경우의 교회는 물질문명의 발달과 함께 대부분 사라졌다. 그것은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겠다며, 작은교회를 표방하던 현장교회들마저도 사회적 변화와 경제적 변화로 인해 오늘 한국교회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든 상태에 이르렀다. 일부 교회들이 한국사회의 경제적 발전과 함께 외국인노동자교회로 탈바꿈 했다. 또한 일부교회는 제도권교회로 편입돼, 기성교회와 똑같은 길을 걷고 있다.

사실 이들 현장교회는 1970-80년대 물질문명의 발달과 함께 타락해가는 한국교회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이들 교회가 하나 둘 문을 닫으면서, 이 희망마저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렇게 현장교회가 무너지면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은 어디에도 희망을 걸 수 없게 됐다. 교회마다 경쟁적으로 맘몬교회당을 건축하고, 거대한 교회당을 채우기 위해 이웃교회의 교인을 빼앗는 교인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교인을 공룡교회에 빼앗겨 문을 닫는 교회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으며, 이렇게 가다가는 10년 이내에 한국교회 역시 유럽교회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점점 커져가고 있다.

화해의 종교로서의 역할 상실

예수 그리스도는 부자와 가난한 자, 부자나라와 가난한나라, 보혁 대결의 구도에서 화해자, 중재자로 오셔 복음의 자유, 사랑의 자유를 선포하며, 정의와 사랑, 평등과 생명의 공동체를 선포하셨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나라운동인 화해자, 중재자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최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2015년 에큐메니칼 정책협의회’에서 사회학자인 오동춘교수는 한국기독교는 ‘화해의 종교’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증오의 종교’라고 말해 한국교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오교수는 또 “한국교회가 분단극복과 민족화해를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친미반공의 권력에 잘 적응했다”고 지적했다. 또 이를 등에 업고 한국교회는 세계교회가 놀랄 정도로 크게 성장했지만, 한국기독교에 독자적인 신학적 이론과 세계적인 신학자가 없는 것은 기이한 일이라고 꼬집었다.

그렇다 보니 오교수의 말대로 한국교회의 신학자들은 과거 영미 신학자들의 식민지신학과 지배신학의 입장에서 발표한 논문을 놓고, 말장난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민족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한민족의 심성을 몰각한 채, 지배 이데올로기와 식민지신학을 후학들에게 그대로 이식시키기에 바쁘다. 마치 영미의 지배신학과 식민신학이 최고인냥 떠들고 있다. 이는 결국 한국교회의 강단을 ‘굿당’ 아니‘신당’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한국교회는 모두 예수 앞에서 결단을 해야 한다. 부자청년이 재산이 아까워 예수운동에 참여하지를 못해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죽어서 잔해만 역사적 유물로 남았다. 이것이 바로 한국교회의 모습이다.

반대로 삭개오는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성서의 경제정의를 철저하게 지켰다. 삭개오는 생명을 얻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다. 부자가 된 한국교회는 변해야 된다. 마음을 비워야 한다. 재산의 반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준 삭개오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펼친 하나님나라운동, 즉 정의와 사랑, 그리고 평화와 화해, 생명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때 비로소 교회를 등진 사람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온다는 진리를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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