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setNet1_2

“교회 분쟁, 신구약에 나타난 법정신으로 해결하자”

기사승인 2020.06.29  14:49:24

공유
default_news_ad1

- 7월 법의 달(1) …… 교회내 다툼 성서의 법서 이탈해 사회법정서 마무리

   
 

법의 통제에서 벗어난 한국교회

흔히 한국교회가 법의 통제에서 벗어났다고 말한다. 이는 한국교회가 법과 질서를 가장 많이 지키지 않는다는 말로 들린다. 교회들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길들여지면서, 교회는 하나님의 법보다, 맘몬을 숭상하며, 강대국을 숭배하고, 권력을 좋아하는 풍토가 조성됐다. 성서의 초대교회의 정신과 예수님의 법정신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교회의 화해자와 중재자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 정서영 목사.

이로 인해 교회분쟁은 갈수록 증대되고, 세상 법정의 문을 두드리는 일이 유행처럼 되어버렸다. 목회자와 교인, 원로목사와 담임목사, 기득권세력과 비기득권 세력 간의 다툼, 목사측과 교인측간의 갈등, 교단과 교회간의 다툼 등등 사랑과 화해의 공동체인 교회는 갈등과 다툼의 온상이 되어 버렸다. 이제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세태가 되었다.

이제 교회의 다툼은 마이너스 성장의 원인이 되고 있다. 교회내 다툼은 교회 내에서 하나님의 법, 성서의 법으로 해결되기보다는 사회법정의 개입으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한국교회가 교회 내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자정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다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은, ‘성서의 법’, ‘하나님의 법’과 인간의 삶과 가치를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세상의 법’을 지키거나, 실천하려는 의지가 부족하다. 그래서 교인들이나, 세상 사람들은 법과 질서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 목회자이며, 교회라고 주저하지 않는다.

이 글의 목적은 첫 번째 한국교회와 목회자, 교인들의 준법정신을 점검하고, 두 번째 구약성서에 나타난 법정신, 세 번째 예수님의 법정신을 조명, 법과 질서를 지키는 교회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분쟁이, 성서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찾는데 목적을 둔다. 특히 교회와 목회자, 그리고 교인들은 법과 질서를 지키지 않으면서, 법과 질서를 가장 많이 강조하는 모순을 지적하고, 법이 누구를 위해서 있는가를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 이 글을 쓰게 된 주된 목적이다.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이 법을 지키지 않는 현장은 교회건축의 현장을 보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분쟁 대부분이 끝을 보이지 않는 것은 교회가 맘몬에 빠져, 하나님나라운동서 이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부목회자들은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교회 내규를 비롯해 규칙, 심지어 헌법까지도 자신의 입맛 맞게 만들고 있는 것이 유행처럼 되었다.

중대형교회 분쟁에 휘말려

분쟁에 휘말린 한국교회의 진흙탕 싸움은 끝이 어디인지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런 교회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는데 안타깝다. 내로라는 중대형 교회들이 교인과 목회자, 교인과 교인, 담임목사와 원로목사 간에 ‘내홍’을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다. 많은 교회가 갈등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는 사이 교회는 갈수록 사회적 공신력을 잃어버리고 있다.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도 크게 상실했다. 교회와 목회자의 신뢰도도 바닥을 치고 있다.

또한 기독교선교의 가장 큰 가치인 전도의 문은, 신뢰도가 떨어진 만큼 좁아지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를 사랑의 공동체로 인식하지 않는다. 자기들끼리 싸우는 이상한 집단, 자기들만 아는 이기적인 집단, 거짓말을 일삼는 비도덕적인 집단으로 인식하고 있다. 교회에 대해서 아무도 희망을 걸지 않는다. 이것은 기독교가 교회내 기득권자, 정치꾼, 가진자들에 의해서 종교의 본질을 상실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분쟁으로 상처를 받은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현상이 곳곳서 일어나고 있다. 아니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부인하는 이들도 있다. 교회를 떠나 휴면상태에 들어간다. 그래서 한국교회를 걱정하는 목회자와 신학자, 그리고 교인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라”(회개)고 말을 주저하지 않는다.

더 이상 한국교회가 분쟁을 방치한다면, 복음전파에 상당한 걸림돌로 작용할 것은 뻔하다. 가뜩이나 교인들이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의 교회의 탈법과 분쟁은 기독교선교의 방해만 될 뿐, 하나님나라를 갈망 할 수 없다. 이들이 바로 적그리스도이다. 그래서 “가던 길을 멈추고, 성서로 돌아가 예수님의 법정신과 구약성서의 법정신을 이 땅에서 실현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나라를 실현하는 것이 아닌가(?) 빽 없고, 힘없고, 미련하고, 가련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성서의 법정신이다. 이 대목서 엉뚱하기는 하지만 아펜젤러의 말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소개한다.

“한국인들은 교회의 생쥐들처럼 가련하고, 개들처럼 게으르고, 돼지들처럼 더럽고, 늑대처럼 탐욕스럽고, 그들은 거의 일하지 않고 쉰다. 그러면서도 이들에게는 칭찬할 것이 있다.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갈구한다. 그들은 그들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려고 노력함에 있어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을 느끼게 한다”(아서 브라운 저, <극동의 지배>)

이 말은 조선의 백성에게 있어 얼마나 수치스러운 말인가. 아펜젤러를 비롯한 조선에 파송된 선교사 대부분은 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선교사들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며, 성서에 나타난 법정신에 따라 천박하고 가난한 조선의 백성들의 권리를 찾아주기 위해서 여러 방향서 노력했다. 여기에 영향을 받은 조선의 백성들은 일본식민지세력에 항거했고, 수명을 다한 이씨조선을 향해 개혁을 요구했으며, 남녀평등사상을 구현했다.

이것이 바로 한국에서의 기독교의 가치이며, 오늘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몰각한 한국기독교가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 분명한 것은 교회 분쟁의 이면에는 돈과 권력(교권), 명예와 쾌락을 쫓는 목회자와 교인들의 탐욕이 자리 잡고 있다. 대다수 교회 분쟁이 농어촌교회나 도시의 미자립교회가 아닌 돈과 권력, 명예를 가진 대형교회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 한국교회의 현주소이다.

또 법으로 엄하게 다스리는 목회자의 성추행, 성폭행 사건이 곳곳서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면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면서 처절하게 당했던 자신의 백성을 기억하고, ‘간음하지 말라’고 했다. 그렇다 성서의 법정신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힘없는 백성을 지키는 것을 교육하고 있다. 그런데 중세교회를 닮아가는 한국교회는 그렇지 못하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교회 내에서 이제 가난하고, 힘없고, 빽 없고, 천박하고, 사회적 약자들이 설자리는 없다. 이것은 작은교회들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교회가 성서의 법정신을 상실하고,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맘몬과 바벨에 길들여진 결과이다.

분쟁 이면에 숨겨진 탐욕과 욕망

사실 시골의 노인 몇 명이 출석하는 조그만 교회나, 혹은 교인들이 몇 안 되는 도시의 미자립교회가 분쟁에 휘말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반면 도시의 대형교회들 중 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교회가 적지 않다. 대규모의 부동산 등 수많은 재산을 두고 분쟁이 야기되는 사례, 교회 주변이 재개발 구역으로 선정되면서 땅 값 상승으로 인해 분쟁이 발생하는 경우, 교권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한 담임목사의 자리를 두고 분쟁이 발생한 사례 등등을 보면,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인가(?) 의문을 갖게 한다.

한마디로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자리를 돈으로 대치시킨 나머지 사이비종교집단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또한 담임목사의 자리를 아들이나 사위 등에게 세습하려다가 분쟁에 휘말린 경우, 담임목사가 재정 의혹이나 성추문 의혹 등 윤리도덕적인 문제도 교회 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다. 시쳇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세속적인 욕망인 돈과 권력, 명예와 쾌락의 노예가 되어 서로 물고 뜯는 ‘이전투구’를 벌이는 모순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 분쟁 담임목사에 의해서

교회 분쟁이 발생하는 일차적 책임에 대해 담임목사의 잘못이 크다는 지적이 강하다. 특히 담임목사와 관련된 재정관련 문제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재정운영과 관련된 문제가 여전히 교회분쟁의 주가 되고 있는 것은 공동의회나 제직회를 거치지 않는 등 집행과정이 투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인들의 기대와 요구는 증대되고 있는데, 불투명한 운영으로 인해 교회재정에 대한 의혹만 증폭되고 있는 셈이다. 목회자가 최소한 교인들이 드린 헌금이 ‘하나님의 헌금’이라고 생각만 했더라도, 이러한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우스운 것은 이러한 재정운용의 문제가 불거지자 일부 교회에서는 십일조로 교인의 자격을 제한하거나, 교인들의 재정열람을 제한하는 등의 ‘정관’이 등장했다. 이에 대한 교인들의 우려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교회도 돈이 있어야 교회에 다닐 수 있다는 애기이다. 심지어 이런 정관을 위한 세미나도 개최되고 있다. 담임목사 중심의 정관개정을 통해, 담임목사에게 반기를 드는 교인들의 목소리를 잠재우고, 분쟁의 불씨를 사전에 꺼 버리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 내 권위주의를 강화하고, 공동의회란 교회의 민주적인 체계와 질서를 무력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점에서 민주적인 정관도입이 시급한 실정이다.

그렇다고 교회 분쟁의 책임이 담임목회자에게만 있다는 것은 아니다. 한국교회가 오늘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은 일차적으로 일부 목회자들의 책임이 크지만, 무조건적으로 이에 편승하는 교인들 역시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 분쟁 대부분이 교회법의 테두리 내에서 해결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유행처럼 사회법정으로 확대되고 있다. 특히 교회분쟁이 사회법으로 몰고 갔을 때는 이미 막장에 온 것이나 다름없다. 교회분쟁은 사건 하나로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모든 사건은 사건에 사건이 꼬리를 물어 끝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일단 교회의 분쟁이 시작되면, 교회는 사분오열돼 생사를 건 사투에 돌입한다. 서로가 물고 뜯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연출된다. 서로에 대한 비방과 욕설, 폭력은 물론이고, 교회법과 사회법에 의한 소모적인 법정공방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 상대방을 제거하기 위해 혈안이 되고 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고 말하면서, 원수가 된다. 이들에게는 피도, 눈물도, 용서도, 사랑도 없다.

오늘 한국교회는 분쟁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것도 문제지만, 이 분쟁은 십중팔구 교회법의 범주 안에서 벗어나 사회법정으로 확대되고, 분쟁이 재생산돼 최소 몇 년을 끄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변호사만 좋은 일 시킨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헌금이 법정소송비용으로 새어 나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한국교회는 세상 사람에게 좋은 모습으로 비쳐지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물론, 성서의 법정신인 이웃을 돌볼 겨를이 없다.

그렇다. 교회 분열과 갈등은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섰다. 교회의 존재 이유에 대한 상실감마저 불러오고 있다. 게다가 교회 분열과 갈등의 과정에서 수많은 교인들이 상처를 입고 스스로 교회를 떠나고 있다. 심지어는 그리스도인이기를 거부하고 무종교가 되거나 천주교나 불교 등 타종교로 개종하는 사례도 급증하고 있다. 이는 한국교회가 ‘사랑과 평화, 생명과 정의의 영적 공동체’로서의 모습을 상실하고 있음을 여과 없이 그대로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세상 사람들을 점차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

노회와 총회 재판국, 돈과 권력 영향력 아래 문제 해결 경향 짙어
교회 분쟁 소모적인 장기전으로 끌고 가 결국 ‘승자도 패자도 없이 종결

공정성 잃은 노회와 총회 재판국

교회 분쟁이 십중팔구 사회법정으로 확대되는 데에는 공정성을 잃은 노회와 총회의 재판국이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노회나 총회 재판국이 정치적 입김과 이해관계에 따라 납득할 수 없는 판결을 내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심지어는 하나의 사건에 대해 노회와 총회 재판국이 양 당사자의 대리인격으로 정면충돌하며 각각 상반된 판결을 하는 촌극도 벌어지고 있다. 이처럼 노회와 총회의 재판국이 각각 상반된 판단이나 해석 하는 경우는 공정하고 정확하게 사건을 바라보지 않고, 돈이나 교권의 영향력 아래서 사건을 다루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 분쟁의 당사자들이 처음에는 교회법의 테두리 안에서 해결책을 모색하다가 결국 사회법정으로 사건을 끌고 가는 것이 수순이다. 이는 노회나 총회의 재판국이 공정한 판결을 내려야 할 책임을 회피하고 직무유기를 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교회 분쟁이 소모적인 장기전으로 흘러, 결국 ‘승자도 패자도 없이 모두가 패자’로 남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도 교회법 안의 판단기관들이 원칙 없는 ‘갈지자 행보’로 일관성을 잃어버렸고, 판결에 대한 신뢰성도 상실했기 때문이다. 교회 분쟁의 책임은 단순히 담임목회자뿐만 아니라, 교인들과 해당 교회가 속한 노회와 총회 모두의 책임이라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성서에 나타난 법정신을 존중하자

성경은 “세상 법정으로 가느니 차라리 손해를 보고 불의를 당하고 속는 편이 낫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이며, 자매이다. 형제간에, 자매간에 송사할 수 있는가. 고린도전서 6장 1절부터 8절을 보면 그것에 대한 해답은 분명해진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일이랴.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 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한국교회는 교회 분쟁을 교회 내부, 교회법의 테두리 안에서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는 흔들리지 않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총회와 노회 재판국의 독립성과 공정성이 절대 훼손되지 않도록 총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도 중요하다. 법과 원칙에서 벗어난 판결이 이뤄지지 않도록 재판국원의 자질을 철저히 검증하고, 혹여 재판에 영향을 미치는 돈이나 권력과의 연결고리를 단절해야 한다. 이럴 때만이 분쟁의 당사자들이 재판 결과에 승복할 수 있다.

한국교회가 교회 분쟁을 줄여 나가기 위해서는 교회 분쟁이 발생하는 절대적인 빈도를 낮춰야 한다. 이는 목회자와 교인 모두가 성서의 법정신으로 돌아갈 때만이 가능하다. 돈과 교권, 명예와 쾌락을 탐닉하는 자세를 회개하고, 이를 버려야 한다. 교회는 목회자의 것도, 장로의 것도, 교인의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것임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아울러 교인들에 대한 교육도 중요하지만, 실행 가능한 제도개선도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 성서의 법정신은 신앙공동체인 교회를 존중한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임을 고백한다면, 한국교회가 소모적인 분쟁에서 해방돼, 성서의 법정신 아래 모두가 함께 예수님의 역사현장인 삶의 현장서 하나님나라를 실현하지 않을까(?)

예수님의 법정신, “법은 사람을 위해 있다”

예수님은 기득권층인 제사장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해 ‘안식일법’과 ‘정결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선언했다. 그렇다 법은, 사람이 법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 예수님의 선언은 한마디로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지키지 못하는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되고, 떠돌이 등 천박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선언이다. 이 선언은 로마의 식민지와 예루살렘의 가진 자들에 의해서 빼앗기고, 업신여김을 당하는 상황에서,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자들을 위한 인권선언이다. 예수는 이들과 함께 역사의 현장에서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그렇다면 오늘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이러한 인권선언을 지키고 있는가에 대해서 방점이 찍힌다.

오늘 한국개신교회에서 유행처럼 만들어지고 있는 개교회 내규나, 교단의 헌법, 노회의 법규 등을 보면, 예수님의 법정신에서 크게 벗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회의 내규는 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목회자 개인에게 맞추어져 있고, 노회의 법규와 총회의 헌법은 치리에 목적을 두고 있다. 이러한 법과 내규는 예수님을 교리화, 제도화 시키면서 철저하게 악용됐고, 악용되고 있다.

한마디로 작금의 교회 내 내규나, 법규, 헌법은 교인들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소외된 목회자들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담임목사, 교권주의자들을 위해서 있다는데 이의가 없다. 더욱이 우스운 것은 이런 법마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잦은 다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문제는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다툼이 끝을 보이지 않는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도 많은 교회들이 사회법정에서 재판 중에 있다. 이런 사이에서 많은 교인들이 스스로 교인이기를 포기하고, 교회를 떠나고 있다.

결국 교회내부의 다툼은 교인들에게 상처만 남길 뿐, 교회성장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를 못하고 있다. 하나님나라운동은 다툼이 있는 곳에서 중재자로서, 화해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화해자여야 할 교회의 지도자들은 다툼의 중심에 서 있다.

특히 공중파 방송을 통해 한국 중대형교회의 다툼과 잘못된 목회자의 모습이 방송될 때마다 많은 교인들이, 교인이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나라 선교에 막대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한국개신교회는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언론들을 ‘적그리스도’로 규정한다는데 안타깝다. 한국개신교회는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이런 언론이 적그리스도가 아니라, 분쟁을 일으키는 교회와 교회지도자들이 바로 적그리스도이다.

그렇다 예수님의 법정신은 다툼과 분열의 현장에서 ‘평화(샬롬)’을 실현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서로 사랑하라는 윤리성이 그대로 깔려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독생자 아들을 보내셨다. 그로 하여금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고 하셨다. 예수님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느냐 아니면 아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느냐고 묻고 계시다. 법도 사람을 위해서 있다. 그리고 법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

법은 사람을 위해 있다

예수님의 인권선언대로 법은 사람을 위해서 있다. 사람이 법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약성서의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의 적대자로 바리새파와 제사장을 내세웠다. 바리새파는 구약을 동원해서 이스라엘 민족운동을 일으켰다.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정신운동을 위하여 예언의 글과 구약의 고전, 그리고 랍비들의 성서해석을 철저하게 이용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을 국민운동의 규율로 적용,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지킬 수 없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괴롭혔다. 하나님의 법을 내세워 법이 담고 있는 본래의 뜻을 변질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오늘 한국교회 역시 바리새파들이 주장한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그대로 따르며, 이를 지키지 않으면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이는 신약성서에 나타난 법정신에 크게 위배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한국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목회자들은 어떻게 설명할까(?) 하나님의 법은 국가 안에서 눌린 자, 가난한 자, 떠돌이, 과부, 어린이,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보호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런데 바리새파는 하나님의 법을 국민 전체를 기동화 하는 도구로 철저하게 이용했다. 이는 법대로 살 수 없는 계층에게 역기능을 가져다가 주었다. 하나님의 법, 성서의 법을 내세워 하나님 앞에 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었다. 예수님은 이들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이들의 인권을 대변했다. 예수님은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서, 그들이 있는 역사의 현장이 예수님의 삶의 현장이었다.

한마디로 바리새파 사람들이 철저하게 동원한 안식일법과 정결법에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사제계층에 국한된 정결법을, 이를 지킬 수 없는 사회적 약자들에게까지 확산시켰다. 오늘 한국교회가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동원해서 바리새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목회자들의 입에서 아무렇지 않게 사회적 약자들을 향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교회당을 하나님의 성전인 만큼,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나와라”, “교회에 나오기 전에 몸을 정결케 하라” 등등 성서와 대치되는 천박한 말들을 강단에서 쏟아낸다. 이런 말들은 매일매일 식량을 걱정하며 사는 사람과 쓰레기를 치우거나, 운전수, 열차기관사 등 주일날도 일을 해야만 먹고사는 사회적 약자들이 지킬 수 없는 법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 당시 정결법은 생활전반에 파급되어 있었다. 이는 가난한 자, 병든 자, 불구자, 불결한 직업을 가진 직장인들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그 중에 예수님과 충돌의 계기가 된 것은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이었다. 고 안병무 박사는 자신의 저서 <역사와 더불어 민중과 함께>에서 “손 씻는 것은 제사 전에 사제가 제사를 집행하기 위한 사제법에 근거한 것인데, 종교적 권위로써 제재하는 법규가 되어 버렸다. 이것은 생활과 아주 동떨어진 것이었다. 사람의 생명을 위한 것도 되지 못하고, 사람을 삶에서 유리시키고, 정죄하는 결과만을 가져다가 주었다. 이런 법은 인간을 위하는 법에서만 의미가 있다. 그러나 바리새파에게는 사람의 삶의 현실보다도, 그 법규를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가 문제되었을 뿐이다”고 지적했다. 이것은 분명 복음서에 나타난 대로 바리새파의 입장이다.

제자들이 밀밭을 지나다가 밀 이삭을 잘라 먹었다. 그곳은 못 가진 자들의 구체적 삶의 자리이다. 구약의 법정신에 따르면, 배고파하는 자들을 돕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모세의 법으로 생활규율을 세우고, 모세를 권위로 내세우면서, 그 기본정신에는 아랑곳하지를 않고, 단지 안식일법, 즉 안식일에 일했다는 것이 불법이라는 시각에 갇혀 있었다.

예수님은 또 한 손이 오그라진 자를 고쳐 주셨다. 그는 사회적 약자였다. 그를 불구상태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곧 모세의 법정신이라고 했다. 바리새파는 누가되었던 안식일법에 위반되었다고 고발하는 위치에 있었다. 안식일에 병든 자를 위해서 일을 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안식일법 제정의 본래 뜻과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것은 분명 법의 정신에서 유리되었을 뿐만 아니라, 법조문을 바리새파에게 유리하게 해석했다. 또 모세의 법은 이혼했으면, 이혼증서를 써주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남성을 향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남성들이 이 조항을 마음대로 해석했다. 이혼을 허락하고 있다고 해석해, 여성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한마디로 이혼을 편법으로 삼았다. 이런 현장에 예수님이 계셨다. 

정서영 목사 webmaster@cknews.co.kr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3
default_setImage2

최신기사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