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창 주 교수

바로는 히브리 노예들의 탈출 소식에 정예 부대를 동원하여 그들을 추격하게 한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손을 높이 들고’ 호기롭게 나아갔다(출 14:8). 이집트와 시내반도의 경계 비하히롯 해변에 다다랐을 무렵 바로의 군대가 바짝 다가왔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잔뜩 움츠러들며 모세에게 불평과 원망을 거칠게 쏟아내기 시작한다. 모세는 우선 이스라엘을 진정시켜야 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야웨의 구원을 보라. 야웨가 너희를 위하여 싸울 것이니 너희는 잠자코 있으라.’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묘사하는 동사가 16절에 명령형으로 연속 네 차례 나온다. ‘(지팡이를) 들라, (손을) 내밀라, (바다가) 갈라지게 하라, (마른 땅으로) 지나게 하라.’ 지금까지 하나님의 천사가 줄곧 이스라엘 앞에서 이끌었다. 출애굽기에서 ‘사자,’ 또는 ‘천사’로 번역된 ‘말아크’는 선도자처럼 줄곧 이스라엘보다 두 세 걸음 앞장서서 간다(출 23:20, 23; 32:34; 33:2). 그런데 향도처럼 이스라엘을 이끌던 ‘하나님의 천사’가 무슨 일인지 이스라엘 뒤로 이동한다. ‘뒤로’는 전치사로서 after, 또는 behind로 이해하면 된다. 대부분 동작을 포함하거나 전제하여 공간적인 이동을 묘사한다(출 14:4,8-10; 23:2).<Houtman, 6>

하나님의 천사를 따라 새롭게 열릴 바닷길을 건너면 이스라엘은 바로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난다. 뿐만 아니라 바다가 더 이상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 곧 동풍이 불어 바닷물이 양쪽으로 갈라지고 바다에 마른 땅이 뚫린다.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는 아무도 걷지 않은 길, 곧 좌우에 물이 벽처럼 서 있는 새 길이 활짝 열린 것이다. 이 때 이스라엘을 인도하던 하나님의 천사와 구름 기둥이 뒤쪽으로 물러간다. 이 길목을 넘어가면 자유와 해방이 눈앞이다. 왜 이토록 절체절명의 순간 천사가 뒤로 움직여 불안을 조장하는 것일까?

지금껏 이스라엘을 앞에서 인도해오던 하나님의 천사와 구름 기둥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그러니 하나님의 천사는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집트 제국의 횡포와 오랫동안(출 12:40) 개개인의 내면화된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용단을 내려야 한다. 그렇다고 천사들이 순간적으로 공간이동 하듯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시내반도로 옮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설령 그렇게 옮겨간다고 한들 압제의 땅에서 벗어날 뿐 여전히 주체로서 그들이 다다라야할 목표지점에는 이르지 못한다. 이스라엘은 미지의 세계, 또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기 위한 중대한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사실 출애굽 ‘엑소더스는 미지의 세계로 발걸음을 내딛는 여정이다(눅 9:31).<Lancaster, Judaism, 137> 이렇게 불확실한 상황의 영적 순례라면 반드시 불순하거나 방해 세력이 똬리를 틀고 있기 마련이다. 그 직접적이며 대표적인 걸림돌이 바로 이집트 제국의 횡포와 간섭이다. 그들은 끝까지 이스라엘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권리를 수용할 수 없었다. 바로는 최대한 압박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힘(force)을 행사하려한다(출 14:9). 마침내 이스라엘은 최후의 관문을 성공적으로 통과하고 자아를 극복할 것인지 갈림길에서 고독한 결단을 내려야할 때가 온다.

이집트의 접경선에 이르렀을 때 자유와 해방에 대한 기대보다 바로의 추격으로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때마침 앞서 가던 하나님의 천사가 뒤로 이동하니 이스라엘의 불안감은 증폭된다. 마치 폭풍 전야의 고요처럼 양쪽이 조용하다(20절).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자 야웨는 바다의 물을 밀어내고 양쪽으로 갈라지게 하셨다. 하지만 앞서 가던 하나님의 천사는 없다. 이제는 이스라엘이 오롯이 한 걸음씩 내디뎌야한다.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과정이다. 그러나 천사가 뒤에서 지켜본다고 믿는다면 그 길을 ‘담대하게’ 갈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천사의 도움 없이 ‘바다의 마른 땅’을 성공적으로 건널 수 있을 것인가?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차이는 두드러진다. 즉 이집트는 이기(self)와 기득권을 고수한 채 바다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무의식의 세계에) 빠져 익사당하지만(출 14:28), 이스라엘은 자아(ego)를 내려놓고 그 ‘자신이 가야할 길’을 지남으로써 침몰당하지 않았다(사 43:2). 결과적으로 그들은 ‘다시 태어났고’ 드디어 가나안 땅에 진입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한신대 구약학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