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덕 교수.

1. 본 주제를 시작하면서

필자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전에 서울에 소재한 전통 있는 한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약 22년 간 학생들을 가르치고 지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학생들의 학교생활을 지도하는, 즉 학생들의 심리적·정신적·윤리적 성장을 도와 훌륭한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학교 생활지도부서를 담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필자는 남자 고등학교 2학년들의 생활지도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일은 주로 학생들이 학교생활에서 발생할 수 있는 학교 규칙 위반여부를 살피거나, 학생들 간의 갈등문제들을 해결하는 일이었습니다. 필자가 근무했던 고등학교는 미션스쿨(mission school)로 학생들, 동료교사들, 졸업생들 등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히 컸습니다. 사실, 졸업생들 중에는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전통이 있는 학교라서 학부모들도 애교심이 매우 컸습니다.

그러나 이런 학교에서 매우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2학년 남학생들 중 6명의 학생들이 늦은 밤에 집 밖으로 나와 다른 학교 4-5명의 여고생들과 만나 가까운 여관에 들어가서 술을 마시고, 어떤 학생은 학생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매우 부도덕한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 일은 학교규칙에 반하기도 하였지만, 특히 미선스쿨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그런 행동이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야단이 났습니다. 더욱이 전통과 명예, 미션스쿨의 입장 등을 가진 학교로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학생들의 이런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교장과 교목을 비롯한 관련 선생님들 모두 11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이 문제를 논의한 결과, 10대 1로 학생들을 퇴학 조치하기로 하였습니다. 1은 퇴학 조치를 반대하는 필자였습니다.

이 결론은 잠정적인 것이었지만, 거의 확정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회의의 결과를 알게 된 그 사건에 연루된 6명의 학생들과 그 학생들의 어머니들은 거의 매일 학교 생활지도부에 와서 무릎을 끊고 잘못하였으니 제발 이 학교에서 졸업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절히 호소하였습니다. 물론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사랑하고 학생들의 미래를 염려하여 퇴학보다는 다른 학교로의 전학을 권고하는 분위기였습니다. 학교의 그런 선처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다른 학교로의 전학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필자가 학생들의 퇴학을 반대한 이유는 학생들의 솔직하고 진실한 반성의 모습을 보고 감동하였기 때문입니다. 필자가 당시 현실적인 인식의 부족이나 생활지도부 교사로서의 역할 부족인지는 모르지만, 필자는 학교의 규칙이나 학교의 입장보다도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에 집중하였습니다. 필자는 반대 입장에 대한 비난이 결코 두렵거나 고난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학생들의 마음을 지켜줘야 한다는 담대한 마음이 더 커졌습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고 사랑하듯이 학생들의 용서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매우 강했습니다.

이런 반대를 하는 필자의 태도에 학교에서는 필자에게 그 학생들을 앞으로 바르게 지도할 대책을 요구하였습니다. 필자는 그 대책을 제시하였고, 그 대책에 대한 실행의 결과를 보고하였습니다. 역시, 학교에서도 학생들을 용서하는 마음으로 약간의 징계를 하는 것으로 결론을 지었습니다. 그 후, 그 학생들은 학교생활에 집중하였고, 3학년이 되어 대학입시 전형에서 모두 좋은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에 연루된 학생들의 처리문제에 있어 필자와 학교가 공통적으로 일치한 점은 잘못한 학생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학교규칙에 따라 학생들을 퇴학처리를 했다고 해서 학생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의 그릇된 행위에 대한 판단이나 처벌 뒤에는 학생에 대한 선생님들의 사랑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하는 것은 옳고, 다르게 하는 그 무엇은 잘못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이 사건을 처리하는 방식 나름대로 정당성과 사랑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학생들을 위한 것이고, 더 교육적이며, 하나님의 방식일까를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필자는 하나님의 양육의 방식도 이러한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을 믿는 가정의 우리 아이들에 대한 양육은 세속적·현실적이기 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과정에서 생기는 고난과 일관된 사랑, 인내 등이 결속하여 어느 정도 일치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과의 연합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필자와 가끔 만나서 신앙과 세상 이야기를 나누는 저의 스승이자 장로님께서는 필자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녀양육’에 대해 연구하여 많은 믿음의 형제·자매님들과 나누는 일이 얼마나 귀하겠냐며, 이 주제에 대한 강의를 요청하셨습니다. 그것 또한 선교사역이라고 필자는 생각하였습니다. 필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 성도이며 교육(학)자로서 나의 역할은 무엇이며, 오늘날 청소년 문제와 관련하여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기도하곤 하였습니다. 이것이 필자가 본 주제를 연구하고 강의하게 된 이유입니다. 부족하지만 주님에 대한 말씀에 기초하여 논문과 서적도 저술하게 되었습니다. 이 점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립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자녀양육’, 즉 하나님 말씀에 기초한 자녀양육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우리는 양육과 교육의 차이점을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양육은 영어로 bringing-up(훈육), breeding(가정교육), care(보살핌), fostering(기르기) 등이라고 합니다. 양육은 학교교육이나 제도교육이 아닌 주로 가정에서 부모들이 자녀들을 기르고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양육은 부모교육과 가정교육과 같은 의미의 교육입니다. 양육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교육이라기 보다 사람으로서 행해야 할 태도, 예의, 건강, 질서, 습관, 언행, 인성 등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양육은 주로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를 기르고, 먹이고, 가르치고, 보살피는 측면을 강조합니다.

이에 반하여, 교육은 영어로 education(교육), schooling(학교교육), teaching(수업), instruction(전문적인 교육) 등이라고 하는 제도교육이나 학교교육을 뜻합니다. 교육은 주로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학생들이 사회의 환경에 잘 적응하도록 필요한 것들을, 즉 교과지식, 취업교육, 재능교육 등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양자의 조화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우리 사회는 양육보다는 교육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그것에 목숨을 걸고 있어서 큰 문제입니다. 양육과 교육을 엄격히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두 영역이 다른 부분이 있지만, 겹치는 부분이 어느 정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양육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가정에서 아이들을 기르고 가르치는 부분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교육은 사회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부분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특히 양육은 인성 측면을 강조하고, 교육은 사회성 측면을 많이 강조합니다. 따라서 필자는 앞으로 교육측면보다는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부모가 가정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고려대 교육문제연구소 교수/안수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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