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강석 목사.

2주 전 주일 이른 새벽부터 아랫배가 살살 아팠습니다.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이것 또 요로결석이 아닌가. 몇 년 전 여름수련회 할 때는 오른쪽 배가 아팠었는데 이번에는 왼쪽이 아픈 것입니다. 밤 2-3시가 되어 혼자 누굴 깨우기도 그렇고 분당서울대병원에 간다 한들 금방 조치해 주는 것도 아니고... 계속 고통을 참아내다가 서울대병원에 수간호사이신 전현식 집사님께 전화를 하여 24시간 쇄석클리닉을 하는 병원으로 간 것입니다. 거기서 치료를 기다리는 동안 소리도 못 지르고 아픈 배를 움켜잡으며 끙끙 거렸습니다. 그때 생각나는 게 불사조였습니다.

저는 젊은 날의 불사조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불사조 같은 삶을 살리라고 다짐하고 다짐했습니다. 불사조는 피닉스(Phoenix)라는 상상속의 새입니다. 이집트의 신화에 의하면 원래 비누(Bynw)라고 하는데 이 비누라는 말을 그리이스(헬라)말로 번역할 때 피닉스라고 하는 것입니다. 상상속의 새인 이 피닉스(불사조)는 세상에 단 한마리만 존재하는 것으로 아라비아 사막에서 산다고 합니다. 빛나는 진홍과 금빛 찬란한 깃털을 지녔고, 독수리만한 몸집을 지녔는데 음성 또한 기가 막히게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이 피닉스 역시도 오래 살다보면 어찌 늙지 않겠습니까? 500~600년을 살고나면 피닉스도 죽을 때가 되어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합니다. 향내를 물씬 풍기는 향나무를 태산처럼 쌓아놓고 불을 지른 다음 자기의 거대한 날개로 부채질을 하여 불길을 절정에 오르게 하여 그 불길 속으로 스스로 곤두박질을 해서 불속에서 타 죽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피닉스 같은 거대한 몸집도 한 두줌의 재 가루로만 남게 되고 맙니다.

그런데 놈은 그 재 가운데서도 싱싱하고 더 활기찬 새 피닉스의 모습으로 부활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더 멋지고 활기찬 피닉스의 삶을 계속 살게 됩니다. 바로 피닉스란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기에 세상 사람들은 이 새를 가리켜 불사조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 신념과 정신력이 표방하여 상상해 낸 것이 불사조라는 새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사조는 인간 신념의 표상이요 인간의 정신세계가 추구하는 최절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의 순간에 불사조라는 새가 생각이 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이 아무리 불사조가 된다 한들 내가 이 고통을 참아낼 수는 있지만 오늘 주일 설교를 제대로 해낼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목포까지 3시간 반 4시간을 타고 가서 목포체육관 집회까지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인가, 견디는 거야 죽기까지 견뎌낼 수 있지만 정상적으로 집회를 할 것인가를 장담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순간 생각나는 게 저의 신념이야 주님을 위해서라면 당장 불길 속에 뛰어 들어서 다시 잿더미 속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나오는 그런 확신이 있죠.

그러나 아무리 내가 불속에 뛰어들 용기와 신념이 있다 하더라도 오늘 주일설교를 정상적으로 잘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확신이 오지 않았습니다. 아픈 배를 앓고 끙끙 설교를 할 수 있겠지만 평상시처럼 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불사조 보다 중요한 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 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지금 당장이라도 불속에 뛰어 들어가라면 뛰어 들어가겠습니다. 아픈 배를 움켜잡고 목포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단에서 벙벙 뛰면서 집회를 한다는 것은 전혀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순간 저는 불사조이기를 포기합니다. 저는 연약한 비둘기만도 못한 종입니다. 아니 주님이 저를 놓아버리시면 허수아비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니 은혜를 주옵소서. 은혜를 주셔서 오늘 이 시간 돌을 깨게 하시고 통증을 멈추게 해 주셔서 오늘 주일설교도 은혜로 하게 하시고 목포집회도 은혜로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정말 기도대로 저는 잠 한숨 자지 못한 가운데도 어찌했는지도 모르지만 2부예배 설교를 하였고 나머지 예배는 영상으로 대체한 후 마침내 목포로 갔습니다. 그리고 목포 집회도 은혜로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불사조보다 중요한 것은 은혜입니다. 저의 신념과 믿음의 깡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더 큰 은혜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오직 은혜, 은혜 위의 은혜를 앞세우며 살 것입니다.

새에덴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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